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2.28 사건 (문단 편집) == 원인 == >“신임 장관([[천이(1883)|천이]])은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대만 섬|그 섬]]에 도착하였는데 수행원들은 교묘하게 타이완을 착취하기에 바빴다……. 군대는 정복자처럼 행동하였다. 비밀경찰은 노골적으로 민중을 협박하며 본토에서 온 중앙정부의 관리가 착취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다.” >---- >[[미합중국 국무부]], [[https://en.wikipedia.org/wiki/China_White_Paper|중국백서]]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한 [[일본 제국]]은 타이완을 [[중화민국]]에 반환하게 되었다.[* 사실 1945년 패전 직전까지 일제가 줄곧 강화 조건으로 내세우던 4가지 조건이 (1) 국체호지(천황제 유지), (2) 외국군의 일본 영내 진주 거부, (3) '''조선과 대만의 유지''', (4) 일본군은 일본이 자체적으로 무장 해제 등이었다. 사실 1차 대전 이전에 일본이 '국제법상' 합법적으로 획득한 영토인 조선과 대만은 [[연합국]]이 박탈하기 어려웠고 [[인도 제국]] 등의 식민지를 두고 있었던 영국은 특히 유화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장제스]]가 고집한 대로 [[카이로 선언]]에 포함된 일제 식민지 해체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핵폭탄 2방]]과 [[소련]]의 참전으로 야기된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관철되어 조선은 독립되었고 대만은 중화민국에 반환되는 결과를 낳았다.] [[대만일치시기]] 시절 대만은 조선에 비해서 식민 통치가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지만 본질적으론 식민지 사람들이었던 [[대만인]]들은 2등 국민 취급을 당했고, 더군다나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시행된 강제동원 정책 등 전시체제는 대만인들의 삶을 더 고달프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제국]]이 물러가고 [[중화민국]] [[국민혁명군]]이 타이완에 진주할 때 많은 대만인들은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했던 중국 대륙의 국민정부에 대해 상당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국민정부]]는 [[중일전쟁]]의 후유증과 [[국공내전]]으로 인해 대륙에서조차 인플레이션과 인력, 물자 부족 문제로 곤란을 겪고 있었고 대륙과 다른 문화를 사딩 대만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다. 게다가 대만인들은 청나라로부터 버림받은 지역이라는 고아의식에 더해서 중국을 조국이라고 여겼던 인사들조차 일치시기에 중국인들에 의해 일본의 앞잡이 혹은 미개한 토인으로 취급받으면서 대만과 중국을 구별하는 우적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직후 대만을 방문한 중국인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당시 대만인들이 우리 대만과 대비되는 너희 중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동일한 맥락에서 우리 대만인과 구별되는 너희 중국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타이완성]] 행정장관 및 경비총사령관으로 부임한 [[천이(1883)|천이]](진의)[* [[천이(1883)|천이]]는 당시 국민정부에서 그나마 가장 대만 사정에 밝았다. 그는 1934년 복건성 주석으로 취임했는데 이때만 하더라도 대만의 근대화 상황을 보고 이를 복건성에 도입하고자 노력했던 인물이었으며 이후 일제의 패망으로 대만을 점령하기 전부터 국민당 지도부와 장제스에 직접 건의하여 대만 연구반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대만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인사였다. 하지만 그런 천이조차 대만 민심도 제대로 못 읽고 전후 혼란기에 강압통치로만 일관함으로써 결국 2.28 사건을 촉발했다.]부터 말단까지 상당수 국민당원들은 1945년 이전부터 대만에 살던 대만 [[본성인]]들을 [[한간|일제의 중국 침략에 협조한 잠재적인 조력자]] 정도로 간주하였다. 특히 대만 행정장관이었던 천이부터 [[일본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까지 졸업했을 정도로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만인들과 일본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을 거부했고 오로지 [[관화]]([[표준중국어]])만 썼다. 당시 일제 통치 50년 동안 일본어를 상용하던 대만 지식인들 중 대륙에서 활동하던 극소수를 제외하면 관화를 쓸 줄 아는 사람은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도[* 또 당시에는 중국 본토에서도 의무교육이 정착되지 못하여 문맹률이 80%에 달했기 때문에 본토인이라고 해도 남부지방 사람들은 관화를 잘 구사하지 못했다.] 관화를 할 수 없는 대만인들에게 아무런 정치적 권력도 주지 않으려고 했다. 당시 타이완의 행정부는 소수 요직은 물론 교사와 말단 공무원, 경찰, 군인까지 1945년 이후 중국 대륙에서 대만으로 넘어온 [[외성인]]들이 차지하였고 구색 맞추기식으로 임용된 소수 [[본성인]]들은 본인 혹은 선대부터 본토에서 [[중국국민당]] 소속으로 항일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더불어 일제가 대만에서 물러가면서 남긴 공장들은 국민정부가 접수한 후 죄다 자신들과 연줄이 있는 [[외성인]]들에게만 불하했기 때문에 대만인들은 다시 차별과 착취를 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또 전쟁이 끝나면서 징병/징용으로 해외로 떠났던 사람들이 대만으로 귀국했는데 국민정부는 이들을 일본에 협력한 [[한간|매국노]]로 몰아 탄압하였다. 경제적으로도 천이가 실시한 전매정책으로 인해 많은 대만인들이 일감을 잃고 먹고 살기가 빠듯해진 데다 일본의 항복 후 일본 본토의 교역망이 일시에 붕괴되면서 타이완의 물가와 실업률 역시 폭등하였다. 결국 본성인들은 국민정부의 대만 통치에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고 실망감도 매우 커졌다. 당시 돌았던 '''"[[일본 제국|개]]가 떠나니 [[중국국민당|돼지]]가 왔다(狗去豬來)."'''는 말이 이들의 심정을 잘 대변하는 말이었는데 일본인은 개처럼 대만인들을 괴롭히고 국민당은 돼지처럼 타이완의 재산을 먹어치우기 바쁘다는 뜻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